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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녀, 칼의 기억’, 이토록 잔인한 멜로였다니

[무비게이션] ‘협녀, 칼의 기억’, 이토록 잔인한 멜로였다니

등록 2015.08.07 01:17

수정 2015.08.10 09:02

김재범

  기자

 ‘협녀, 칼의 기억’, 이토록 잔인한 멜로였다니 기사의 사진

한국형 무협의 기운이 강하다. 화려하다. 압도적이다. 유려하다. 그 어떤 수식어로도 ‘협녀, 칼의 기억’의 시작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할 듯하다. 하지만 스크린에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쯤 ‘협녀’는 관객들에게 지독한 멜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잔인할 정도로 감정의 농도가 짙다. 이 정도의 지독스러운 사랑 얘기는 한국영화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사실 ‘협녀’에 대한 기대치는 ‘무협’이다. 차고 넘치는 ‘무협’이 ‘협녀’ 속에 세밀히 조율돼 있다. 하지만 멜로의 기운이 강하다. 잔인할 정도의 감정적 소모가 있다. 한국형 무협이란 외피를 쓰고 있지만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너무도 강력한 감정 액션이자 사랑 얘기가 ‘협녀, 칼의 기억’이다. 그 사랑은 극단으로 치닫는 서글픈 ‘비가’(悲歌)다.

배경은 고려시대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적 묘사는 모호하다. 무신정권 시대, 혼탁한 세상을 구하자고 ‘도원결의’를 떠올리는 세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 정권을 심판하려 든다. 풍천(배수빈), 설랑(전도연), 덕기(이병헌) 이들 세 사람은 ‘풍진삼협’이라 불리며 파죽지세로 민란을 주도한다. 정권의 수장 이의명(문성근) 장군의 아들 존복(김태우)을 사로잡은 이들은 민심의 준엄함을 들이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막내 덕기가 배신을 한다. 욕심이다. 평생 ‘의’를 위해 ‘협’을 쫓았던 ‘풍진삼협’이 깨지는 순간이다. 풍천은 죽는다. 덕기는 설랑에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설랑은 그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덕기의 욕심이 문제였다. 하지만 욕심이 문제일까. ‘공수레공수거’란 말도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다. 덕기는 존복을 통해 우연히 자신의 심연 속 욕망이 터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왜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것인가.”

 ‘협녀, 칼의 기억’, 이토록 잔인한 멜로였다니 기사의 사진

덕기는 욕심대로 힘을 손에 쥐게 된다. 이름도 ‘유백’이 됐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됐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의 눈에 잊고 지낸 기억이 나타난다. 자신의 사병을 모집하는 무술경연장에서다. 느닷없이 나타난 복면의 한 사내는 경쟁자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트린다. 그의 몸짓이 눈에 익다. 설랑이다. 과거설랑은 유백에게 “너와는 나는 풍천의 딸 홍이에게 죽을 것이다”는 경고를 했다. 저 사내는 홍이다. 사라진 설랑의 그림자다. 유백은 무언가에 쫓기듯 그를 따라나선다.

영화의 제목인 ‘칼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칼은 권력이고 힘이고 폭력이다. 폭력이 곧 정의가 되고 힘이었던 시절, 세 사람은 불의가 아닌 정의를 위해 싸웠다. 칼은 이들에게 폭력이 아닌 ‘협’ 그 자체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도 아닌 칼로서 그것을 분별했다. 칼은 그런 시대에 결국 ‘의’의 진심을 결정짓는 ‘협’의 도구였다. 그렇게 ‘풍진삼협’의 칼은 유백과 설랑(월소) 그리고 홍이(김고은) 세 개의 칼로 다시 이어진다.

 ‘협녀, 칼의 기억’, 이토록 잔인한 멜로였다니 기사의 사진

‘협녀’ 속 등장하는 세 자루의 칼은 그런 의미다. ‘의’를 꿈꾸며 ‘협’의 수단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한 결과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끝의 마침표는 세 갈래 길로 찢어지고 만다. 하나의 칼(덕기-유백)은 욕심, 또 하나의 칼(설랑-월소)은 증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칼은 복수(홍이)다. 욕심과 증오 그리고 복수의 갈림길 중심에 사랑이란 예상 밖의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자루의 칼 가운데 흐름의 중심은 바로 설랑-월소의 검이다. ‘풍진삼협’의 설랑은 덕기의 배신 뒤 눈이 먼 뒤 월소란 이름으로 숨어 지내며 홍이를 키워 복수를 꿈꾼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흐름이 이어질수록 유백과 월소의 거리를 점차 끌어당긴다. 기다란 줄로 이어져 있던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점차 다가선다. 한 남자는 욕심에 눈이 멀었다. 한 여자는 지독히도 지켜내려고 했던 ‘의’와 ‘협’의 길이 무너진 것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 두 사람의 검은 강렬한 파열음을 내면서 부딪쳐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파열음의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예상 밖의 감정이 드러나면서 ‘협녀’는 ‘무협’의 외피 속에 담겨 있던 진짜 얘기에 관객들의 오감을 집중시킨다.

 ‘협녀, 칼의 기억’, 이토록 잔인한 멜로였다니 기사의 사진

홍이가 왜 월소의 손에 길러진 채 부모의 복수를 꿈꾸고 유백에게 칼을 들이 밀었는지, 왜 월소는 눈이 먼 채 홍이를 기르며 유백의 심장을 노렸는지, 유백은 자신에게 점차 다가오는 설랑(월소)의 그림자에 왜 그토록 기묘한 감정의 굴곡을 드러냈는지. 이 모든 해답은 영화 마지막 세 자루의 검이 부딪치는 ‘칼의 대화’ 속에서 끔찍스런 진실을 드러내면서 세 사람의 가슴을 찢어 놓는다. 욕심과 증오 그리고 복수의 한 가운데 자리했던 죽음보다도 잔인한 사랑의 감정은 ‘협녀, 칼의 기억’이란 제목 속 ‘기억’을 잡은 채 길고 긴 여운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고 때리고 흐느끼게 할 것이다.

덕기-유백을 연기한 이병헌은 표정 하나로 눈빛 하나로 캐릭터 자체가 되는 신기의 내공을 펼친다. 고려 최강의 초절정 무술 고수인 ‘덕기-유백’은 곧 이병헌 자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력하고 또 화려하며 멋스럽다. 초고속 카메라인 ‘팬텀’으로 촬영된 영화 속 유백의 무술 장면은 ‘와호장룡’을 무색케 할 비주얼로 재탄생됐다. 설랑-월소를 연기한 전도연 역시 강력한 아우라를 발휘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 검객’을 연기하기 위해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그의 체감은 스크린을 통해 고스란히 튀어나올 정도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 준 처연한 전도연의 눈빛은 ‘협녀, 칼의 기억’ 속 화룡점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기억에 각인될 소리없는 비가(悲歌) 그 자체다. 두 사람의 어울림에 비해 김고은의 폭발성은 강렬하고 날카롭다. 그가 왜 충무로 20대 여배우로서 꼭지점에 서 있는지는 ‘협녀, 칼의 기억’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협녀, 칼의 기억’, 이토록 잔인한 멜로였다니 기사의 사진

여러 악재와 루머가 나돌았다. 한때 개봉 자체가 불투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린 ‘협녀, 칼의 기억’은 기대 이상을 넘어선 그 이상이다. 무협이란 외피로 설명하기 힘든 잔인한 사랑의 파열음이 귓가를 아직도 울린다. 이토록 잔인하고 슬프고 묵직하며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낼 멜로의 힘이 또 있었던가. 개봉은 오는 13일.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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