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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 이봐, 이만큼 넘어져 봤어?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 정주영 - 이봐, 이만큼 넘어져 봤어?

등록 2017.04.13 10:48

수정 2017.08.29 10:40

박정아

  기자

편집자주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대기업 창업자들부터 미래를 짊어진 스타트업 CEO까지를 고루 조망합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이 현직 기업인은 물론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주영 - 이봐, 이만큼 넘어져 봤어?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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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계층의 세습이 고착화된 듯한 시대. 평범한 사람들은 취업이든 창업이든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습니다. 이에 헬조선, 수저계급론 등 자조 섞인 비관론이 만연한 것도 사실.

시련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사람을 소개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가난한 집에 태어난 15살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부모님을 도와 열 살 때부터 농사를 지었지요. 소학교 졸업 후엔 진학도 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도 많고 살림은 점점 더 쪼그라든 탓.

“내가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한 소년, 집을 나서게 됩니다.

집을 나온 소년은 철도 공사판 흙을 나르는 등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차례 노력합니다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가난이라면 치를 떨었던 이 소년의 이름은 바로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아산 정주영 회장입니다.

정 회장의 계속된 도전. 각종 막일을 전전하던 그는 경성에서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을 합니다. 남다른 성실함으로 사장의 신임을 얻다 급기야 쌀가게를 물려받게 되는데요. 1938년, 그의 나이 23살 때의 일입니다.

“가난하고 학벌이 없더라도 나를 견본으로 삼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매진해서 발전하기를 바란다”

호사다마랄까요. 쌀가게인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에 중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쌀이 배급제로 바뀌어 어렵게 일군 쌀가게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이듬해 빚을 내 맡은 아도 서비스 사업도 한 달여 만에 불이 나고 맙니다.

정주영 회장은 한 번 더 빚을 내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합니다만 일제의 기업정리령으로 그마저도 빼앗깁니다. 어린 시절 집을 떠날 때처럼 맨몸이 된 정 회장. 1942년, 수중에 남은 걸로 겨우 광산을 인수하지만 이것도 3년 만에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됩니다.

시련의 연속이었던 그에게 조금씩 빛이 들기 시작한 건 해방 후. 1946년 미군정청 산하기관으로부터 200여 평의 땅을 매입해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엔 현대토건사를 설립합니다. 현대그룹의 서막이었지요. 기세를 몰아 1950년엔 두 회사를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세웁니다.

술술 풀리던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맙니다. 게다가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부산까지 피난을 떠나야 했지요. 그동안 애써 이룬 것들을 또다시 잃어버린 것.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피난 중에도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통역장교로 일하던 동생을 통해 미군 사령부의 토목사업을 따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서울 수복 후 미8군이 발주한 토목공사까지 도맡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후엔 허물어진 도시 곳곳에 건설 수요가 급증, 사업이 호기를 맞습니다. 자동차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를 조달하기 위해 공장도 세웠습니다.

“얘기치 못한 수많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결코 없다는 것이 내 삶의 체험에서 얻은 신념이다”

물론 기업가로 성공한 후에도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은 있었습니다. 1992년 원대한 꿈을 안고 대선에 도전하지만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에 머무른 것. 그 후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과 국회의원직까지 사직하고 마는데요. 낙선 후의 정 회장,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요?

“낙선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그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특유의 긍정으로 좌절을 털어낸 정주영 회장은 다시 현대그룹으로 돌아가 기업 활동에 전념, 금강산 관광 등 대북 사업을 시작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요.

쌀가게 배달원으로 시작해 현대그룹을 일군 한국 경제계의 거목 정주영 회장. 그의 성공은 이처럼 실패하고 넘어지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는 과정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긍정적인 사고와 도전정신이 만든 그의 ‘흙수저 신화’는 지금 이 시대에 유독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 자세에 달려있다”

뉴스웨이 박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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