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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람 기자
등록 :
2020-10-25 13:27

[이건희 회장 별세]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45세에 회장 추대

1942년 3남 5녀 중 일곱 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 ‘배움’위해 日 도쿄로 유학
스스로 전자제품 분해하고 조립하기도

그래픽=박혜수 기자

한국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작은 거인 이건희 삼성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42년 1월 9일, 3남 5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바쁜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를 대신해 경남 의령 외할머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47년 5월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사업 확장을 계기로 서울로 터를 옮겼다. 이후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마산, 대구, 부산 등으로 피난살이를 했다.

그 사이 이 회장은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큰형 이맹희 씨(전 제일비료 사장), 작은형 이창희 씨(1991년 별세)와도 각각 11살, 9살의 나이차이가 나 상대적으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1953년엔 “선진국에서 보고 배우라”는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뜻에 따라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이 회장은 1989년 월간조선 12월호 인터뷰를 통해 “친구도 없고 놀아줄 상대가 없어, 많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됐다”며 “가장 민감한 나이에 차별과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등을 절실히 느꼈다”라고 회고한다.

이 회장은 유학 시절 남는 시간을 대부분 영화를 보며 지냈다. 하루에 한 편 이상 약 1000여편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레슬링과 애완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때 프로 레슬러 ‘역도산’을 본 이 회장은 고교 시절 한국으로 들어와 부모의 반대에도 서울사대부고에서 레슬링을 시작한다.

몇 안되는 한국인 친구들을 만난 시기도 이 때다. 홍사덕 의원이 대표적이다. 홍사덕 의원은 청소년 이건희를 엉뚱하고 고집이 센 친구로 기억한다. 홍 의원에 따르면 이 회장은 고교 때부터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 같은 관심이 삼성의 인재 경영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실제 이 회장은 직접 나서 6시간에서 7시간씩 임직원 면접을 진행하기도 했다. 임원들에게도 서로 믿고 힘을 합쳐 초일류 기업이 될 것을 강조했다.

고교 시절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와세다 대학을 다닐 때는 전자 제품과 자동차 등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데 빠진다. 업계에서는 당시 이 회장의 경험이 삼성의 반도체, 전자산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1965년 조지워싱턴대에 진학해선 당시 중앙일보 회장이던 홍진기 씨(1986년 작고)의 장녀 홍라희 씨와 맞선을 본다. 이듬해 한비사건으로 귀국한 그는 1966년 동양 방송에 입사, 1967년엔 홍라희 씨와 결혼한다.

이 회장은 호암 이병철 창업주를 따르며 경영을 배웠다. 장인인 홍진기 씨로부터는 행정과 법, 개념, 사회 등을 배웠다.

애초 이 회장은 삼성 후계자가 아니였으나 타고난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두 형을 제치고 후계자로 낙점됐다. 호암은 일본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장남은 성격상 기업에 맞지 않고 둘째는 중소기업 정도의 사고 방식 밖에 없어 삼성을 맡길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삼성 부회장에 오르며 후계 자리를 공고히했다.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파산 직전이던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룹 측에선 반도체가 사업성이 없다고 봤지만, 이 회장은 달랐다. 미래 산업이 반도체에 달려있다는 판단해 과감히 투자했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1983년 본격적인 반도체 산업 진출 선언을 한다. 호암은 기술 부족과 많은 비용 등에 따라 삼성이 반도체 산업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이 회장은 수년 간의 끈질긴 설득으로 반도체 산업 진출과 관련해 호암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7년 호암 이병철 창업주가 별세하자 이건희 회장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1993년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불량은 암이다’, ‘양보다 질’ 등으로 유명한 신경영을 내세운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일본 기업을 뒤따르는 추격자에서 디지털 산업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1999년부턴 이 회장에게도 어려움이 닥친다. 폐 림프절에서 암세포가 발견돼 수술을 받기도 하고 2000년에는 본인이 가장 사랑했던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하게 된다. 1997년 외환 위기 후 다른 그룹과의 ‘빅딜’마저 실패한 탓이다. 이 회장은 사재 2조8000억원을 내놔야 했다.

2006년에는 삼성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1년여 이상 삼성특검 조사가 끝난 뒤 기소가 돼 2008년 4월22일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다. 2년 가까이 칩거한 그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사면된 뒤 2010년 3월24일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한다. 그러나 2014년 이 회장은 자택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다. 2020년 10월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진다.

장가람 기자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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