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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카드뉴스]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등록 2016.08.15 06:00

수정 2016.08.15 08:41

이성인

  기자

편집자주
숨겨진 독립운동가의 면모를 이제야 세상에 알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이들을 비롯해 시대의 부조리에 굴하지 않았던 분들께 상당 부분 빚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76년 전 거리로 뛰쳐나온 부산 학생들은 더 있었다 기사의 사진

항일학생운동 ‘노다이 사건’을 아시나요?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고자 학교병영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1940년 경남의 한일 학생들을 참여시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개최한 ‘제2회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도 그 일환이었지요.

무장행군, 수류탄 던지기 등 15종목이 펼쳐진 대회. 당시 심판장은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대좌인 일본인 노다이(乃台)였습니다. 그는 일본 학생들의 우승을 위해 대회를 편파적으로 운영했음은 물론 조선 학생들을 모욕하기까지 했는데요.

이에 조선 학생들은 폐회식 때 일본 국가 제창을 거부하고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며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여기에 그동안의 설움마저 복받친 학생들, 마침내 거리로 뛰쳐나와 전면적인 항일시위를 펼치게 됩니다.

학생들은 부산 보수동‧광복동 일대에서 일본 경찰과 맞서며 금지곡이었던 ‘황성옛터’와 민요를 불렀고, 나아가 ‘대한독립만세’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밤에는 고학년을 위주로 노다이 대좌의 가택을 습격하기도 했지요.

이 사건이 바로 노다이 사건으로도 알려진 ‘부산항일학생의거’입니다. 광주학생의거(1929년)와 더불어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항일학생운동으로, 일제 말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던 부산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학계도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최근 이 의거에 참여한 이들 10명의 명단이 추가로 확인됐습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원장 이상진)은 당시 시위를 전개한 학생들 전체 명단이 수록된 「퇴학생학적부」 등 총 12권을 최초로 발굴해 공개했는데요.

학적부를 통해 확인된 의거 참여자는 총 1021명, 징계까지 받은 학생은 83명이었습니다. 바로 이 83명 중 그간 알려지지 않은 10명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지요. 이들 10명은 마침내 항일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예를 회복하게 됐습니다.

학적부는 사료로서도 의미를 지닙니다. 그동안 이 사건은 단편적 신문기사나 참가자들의 회상에 의존했던 게 사실. 이번에 의거 참여자 전체 명단과 처벌 내용이 학적부를 통해 공개됨으로써 역사에 그 가치를 보다 뚜렷이 새길 수 있게 됐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일제의 만행, 권력의 부조리에 굴하지 않았던 76년 전 학생들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길 때입니다.

이성인 기자 s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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